영화 기생충에는 감독이 의도했든 아니든 엄청나게 많은 메시지들과 메타포들이 숨어 있고 각 장면들이 해석하기에 따라 관객들로 하여금 다양한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봉준호 감독이 영화를 보고 나서 수많은 생각이 들었으면 좋겠다고 한 말이 정말 그대로 녹아 있는 영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화 내용은 초반부터 결말까지 너무도 친절하게 우리를 이끌어주기 때문에 내용 자체에 대한 해석은 굳이 필요 없을 듯합니다.
데칼코마니
먼저 제가 생각하는 이 영화의 핵심 키워드 중 하나는 바로 선입니다. 영화 기생충의 원래 제목은 '데칼코마니' 였었다고 하는데요. 데칼코마니는 한쪽 면에 그림을 그리고 종이를 반으로 접어서 대칭되는 모양을 찍어내는 방식입니다. 이때 반대편 대칭을 찍어내기 위해 종이를 반으로 접는 순간 그들 사이에는 바로 선이 생기게 되는 거죠. 그 선을 기준으로 새로 찍어진 복사본은 결코 원본이 될 수 없듯이 이 영화에서 상류층인 박사장이 강조하는 선이라는 건 결코 하층민들이 넘어설 수 없는 것이며 같은 재료로 만들어진 생김새도 비슷한 인간들이지만 그들만의 분리가 확실하다는 걸 제목에서부터 암시하려는 듯했습니다. 그런데 이 선을 넘어갈 수 있는 유일한 매개체는 바로 냄새인데요. 영화는 선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유일한 매개체인 냄새를 강조하며 결국 냄새 외에는 아무것도 선을 넘을 수 없다는 걸 깨닫게 해 줍니다. 기우가 처음 박사장 집에 방문한 날 가정부 문광이 사모님인 연기를 깨우는 장면에서 기우가 유리창을 통해 아래쪽을 바라보는데 그때 통유리가 이어진 부분에 세로로 선이 그어져 이 둘의 관계를 선으로서 명확하게 구분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분명 이들만의 선이 존재함을 암시하며 박사장 집에서의 공존이 시작됩니다. 그렇다면 이 선은 정말 아무도 넘지 못하는 것이었을까요. 제가 영화를 보고 나서 가장 소름 끼쳤던 부분 중에 하나가 있는데요. 왜 가족 중에 하필 딸인 기적만 죽었을까입니다. 4명의 가족 중에 이들이 말하는 선을 넘을 수 있는 사람을 뽑자면 저는 유일하게 기정 하나뿐이라고 생각합니다. 학원에 안 가는 게 아니라 형편이 어려워 못 가는 것뿐이지 뛰어난 기술을 가지고 있으며 실제로 다송이가 기정을 만나자마자 예의 발라지는 모습에서 그녀의 능력치는 충분히 입증되었다고 봅니다. 그리고 욕조에서 목욕을 하며 tv 보는 모습을 본 기우가 굳이 강조하듯 말합니다. 이렇게 선을 넘을 가능성이 있는 기정이 죽음으로써 결국 누구도 선을 넘을 수 없다는 걸 더욱 잔인하게 한 번 더 강조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이 데칼코마니라는 제목도 정말 소름 돋는 제목입니다.
계급의 빈부격차
그리고 또 하나의 키워드는 계급 빈부 격차입니다. 비가 와서 반지아 사람들은 물난리로 생존이 위협받고 피난민 생활을 하지만 고지대에 사는 상류층들은 비가 와서 날씨가 맑아졌다며 행복해합니다. 영화 내에서 박 사장 가족은 대부분 계단을 오르는 장면이 나오는데 기택의 가족은 계단을 내려가는 장면이 자주 나옵니다. 영화의 처음과 마지막에 반지하가 등장할 땐 카메라 앵글이 위에서 아래로 수직 하강하며 이들이 상하관계에 있음을 명확히 암시합니다. 그리고 기생에서 사는 이들이 보스 보호를 사용하는 것과 대조되도록 박 사장은 아들과 무전기를 가지고 노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죠. 무전기의 시초가 아마도 이 모스부호를 사용하는 방식이었겠죠. 극 중에 다송은 모스부호를 해석하려다가 대충 팽개치고 누군가에게 알리거나 더 이상 해석하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습니다. 하층민들에겐 생존 수단인 모스부호가 다송에겐 그저 하나의 놀이에 불과했던 거죠. 그리고 혹시 눈치채셨나요. 다송이 자화상이라고 그린 그림은 박사장네 가족보다 살짝 아래쪽에 걸려 있습니다. 이건 자화상이 아니라 바로 다송이 귀신으로 착각했던 문강의 남편 근세였는데요. 오른쪽 아래에 까맣게 지하실 입구처럼 칠해져 있는 걸로 봐서 더 명확히 알 수 있습니다. 다송이 생일날 그가 지하에서 올라오던 모습을 잊지 못하고 계속 그려왔던 거죠. 이 빈부격차에 따라서 마인드 차이도 알 수 있는데요. 기우는 다해의 일기장을 훔쳐봐 가며 그녀에게 약간의 집착을 보이는 반면 유학 간 기우의 친구는 진지하게 생각한다며 신신당부까지 해놓고는 단 한 번의 전화 통화 장면조차 나오질 않습니다. 그리고 연교가 기우에게 급여를 주는 장면에서 봉투에 돈을 넣었다가 아무렇지도 않게 5만 원짜리 몇 장을 빼고 주면서도 더 넣었다고 하는 걸 보면 이들에게 이 정도의 돈은 더 줘도 그만 덜 줘도 그만이라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참 영화를 보면서 봉준호 감독이 정말 디테일의 끝판왕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던 장면이 하나 있는데요. 바로 짜파구리신입니다. 하층민들은 아껴가면서 먹을 법한 한우를 굳이 짜파구리에 넣어서 새 가족의 공존을 암시하기 시작하며 연교가 이걸 젓가락으로 뒤적거리다가 결국 한우 한 조각을 라면 제일 위에다가 얹어놓는데요. 밑에 깔려 있는 두 종류의 라면 즉 두 가족이 아무리 얽히고설켜도 결국 그 위에 본인들이 존재함을 암시하는 디테일한 묘사였다고 생각합니다. 심지어 이 한우 짜파구리를 두고 다투는 딸과 아내에게 박 사장은 말하죠. 그리고 제가 느꼈던 가장 극심한 대조 매개체는 바로 변기입니다. 박 사장의 집에서 유일하게 변기가 등장하는 건 지하 벙커에 가장 아래쪽에 있는 병기인 데 반해 기택의 반지하 집에서 변기가 가장 높은 곳을 차지하고 있죠 이런 장면들을 교차해서 보여주며 영화는 하층민의 동질감을 느끼는 관객들로 하여금 엄청난 상대적 박탈감을 가지게 만듭니다. 관객들에게 이 상대적 박탈감을 그나마 해소해 주리라 믿음을 주며 등장하는 매개체가 저는 수석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수석의 등장으로 하여금 이 계급 사회를 깨부수거나 뭔가를 해소해 주리라는 기대를 잠시나마 하게 만들지만 결국 이 수석은 상층민들에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하고 그저 하층민들끼리 싸우는 도구로 전락하며 심지어 이것으로 인해 기운은 머리를 다치고 죽을 고비까지 넘깁니다. 이 수석이 마지막에 다시 물속으로 돌아가는 장면에서 결국 이 돌은 이들에게 희망만 주었지 아무것도 바꾸지 못했구나 하는 생각에 다시 한번 씁쓸함을 느꼈습니다. 영화 내에서 같은 하층민들끼리 상대적 우월감을 갖는 그러니까 그들만의 또 다른 계급 사회를 표현하는 장면들도 있었는데요. 영화 초반부에 피자나라 사장이 자신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충숙에게 반말을 섞어가며 막말하는 장면 문광이 남편을 찾으러 처음. 지하실로 내려갈 때 충숙은 따라 내려가기를 꺼림칙해하고 결국 지하에 내려가서 그들을 혐오스럽게 쳐다보기까지 합니다. 심지어 기택은 문강의 남편에게 이런 곳에서도 사람이 사라지냐며 안타까운 표정으로 이야기하죠. 이렇게 영화는 관객들의 멘털을 흔들어대며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어디에 감정 이입을 해야 할지 결정 내릴 틈조차 주지를 않습니다. 또 하나의 키워드는 바로 냄새입니다. 유일하게 선을 넘나들 수 있는 이 냄새 박 사장이 기택의 냄새에 대해서 설명을 하려다가 결국 마지막에 정리한 것이 지하철을 타는 분들 특유의 냄새가 여기서 수많은 관객들에게 감독은 또 한 번 박탈감을 안겨줍니다. 기택이 운전하면 차 안에서 조수석의 발을 올리고 있는 연교의 모습이 나오는데요. 발은 연교가 올리고 있지만 냄새는 기택에게서 난다는 즉 상층민은 뭐래도 상층민이고 하층민은 뭐래도 하층민이구나 하는 걸 암시한 게 아닌가 싶었습니다. 냄새에 관련해서는 마지막에 아들이 죽어가는 상황에서도 박 사장이 차키를 집으려다 냄새에 코를 막는 모습에서 정점을 찍습니다. 이 모습을 본 기택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박 사장 몸에 칼을 꽂아버립니다. 이렇게 영화에서는 이 냄새를 통해 우리 사회에서 하층민들이 하는 무언가 들을 상층민들이 못마땅해하고 무시하며 이에 대해 자격지심을 느낀 하층민들이 가지는 분노를 표현한 것 같아요. 또 하나의 키워드는 벌레입니다. 박 사장 부부가 소파에서 잠든 사이 테이블 밑에 숨어있다가 마치 바퀴벌레처럼 기어서 도망치는 모습 내 발로 계단을 오르내리고 지하실 문을 열 때 팔다리를 이용해 장식장을 미는 모습 모두 바퀴벌레나 꼽등이 같은 벌레를 연상케 합니다. 그리고 기우가 처음으로 박사장 집에 갔던 날 다송이가 인디언 복장을 하고 기우가 있는 방향으로 화살을 쏘는 장면에서 벌레가 들어왔을 때 에프킬라를 뿌리는 인간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술 얘기를 빼먹을 수 없겠는데요. 처음엔 단순히 이들의 술 종류가 바뀌는 것에만 초점을 맞췄다가 두 번째 영화를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치 야생 생활을 하던 벌레들이 야생에서 음식물 찌꺼기나 불순물들을 섭취하며 생활하다가 가정집에서 기생을 하기 시작하며 집주인들이 잠들거나 자리를 비운 사이에 방치되어 있는 상대적으로 양질의 음식물을 섭취하게 되는 과정인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걸 좀 더 명쾌하게 받아들인 건 기우가 처음으로 기정을 박사장 집에 데리고 간 날 초인종을 누르기 전에 둘이 암기를 위한 노래를 부르는데요. 이때 기정이 까딱거리던 손가락 모양이 마치 바퀴벌레에 더듬이를 생각나게 하더라고요 그리고 더듬이가 딱 멈추자마자 바로 초인종을 누르는 그 디테일한 동선에서 야생 생활을 하던 벌레들이 인간의 집으로 하나 둘 더듬이질을 해가며 들어가는 것 같아 보였습니다. 여기서 노래가 하필 독도는 우리 땅이라 갑자기 일본 생각이 나는 건 저뿐인가요. 다음은 지하 벙커입니다. 이 지하 벙커는 내부가 마치 사람 몸속처럼 복잡하게 꼬여 있어서 숙주의 몸속임을 암시하는 듯한데요. 이곳은 전화도 잘 터지고 화장실도 있고 어떻게든 생존이 가능하게 되어 있죠 하지만 숙주들은 이 안에서 그들이 목숨을 걸고 싸우고 성관계도 하며 수년간 생활하고 심지어 자신들의 음식을 축내는데도 아무런 인지도 하지 못합니다. 인간이 몸속 기생충들이 자신의 영양분을 섭취하며 기생하고 사는 것에 아무런 인지도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죠. 다음은 인디언이라는 키워드를 빼먹을 수 없겠죠. 인디언이라는 매개체는 그저 이곳에선 서로 공존할 수 없음을 암시한다고 생각합니다. 단지 이를 사용함으로써 관객들로 하여금 아 인디언들이 침략자들에게 쫓겨난 것처럼 결국 이들이 박 사장 가족을 쫓아내겠구나 하는 잘못된 반전을 기대하게 만드는 장치라고 생각합니다. 심지어는 미제 텐트가 인디언 복장을 한 다송의 비를 막아주는 아이러니함도 보여주면서 더욱 관객들을 헷갈리게 만들죠 하지만 결국 인디언이건 뭐였던 건 다송에겐 그저 하나의 놀이에 불과했다는 사실이 관객들을 더 씁쓸하게 만들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다음은 성욕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반지 하나 지하벙커에서 등장한 다수의 콘돔은 자식을 많이 낳아 키울 여건이 안 되는 하층민들에게 어쩌면 필수품처럼 보이는데요. 소파에서 아무 생각 없이 유사성행위를 하는 박 사장 부부는 그저 놀이를 즐기듯 여유롭기마저 합니다. 이 소파 애정신을 얼핏 보면 차에서 발견한 속옷 이야기나 마약 이야기를 하며 흥분하는 박 사장 부부의 모습에서 겉으로만 근엄한 척하는 상류층들의 모순됨을 비판하는가 싶지만 잘 생각해 보면 이들은 그저 그들의 현실에서 실제로 일어나지 않을 그들에겐 일종의 탈락이거나 일탈일 일들을 떠올리며 그저 그들만의 상황극을 즐기는 것일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기사에게는 여관비를 아끼냐 할 데가 없어서 차에서 하냐라고 말해놓고 막상 본인들이 소파에서 할 땐 여기 꼭 내 차 뒷자리 같지 않아라고 하는 장면도 실제로 본인들은 차 뒷좌석에서 해본 적도 없고 품이나 위생 때문에 해볼 생각도 없지만 그저 그런 상황들을 상상하며 흥분하는 모습일 뿐입니다. 그들에겐 소파에서 잠을 자는 것조차 일종의 일탈이었으니까요. 그리고는 그 아래에 숨어 있는 기택의 가족들에게 카메라 앵글이 수직 하강하며 여지없이 이들의 계층 관계를 잔인하게 또 한 번 강조합니다. 같은 장면 다양한 생각 똑같은 장면을 보고 우리는 각자 어떻게 생각하고 받아들이게 될까요. 홍수가 난 반지와 화장실에서 오물이 솟구치는 변기 뚜껑을 기정이 깔고 앉아 담배 피우는 모습을 봤을 때 여러분은 어떤 생각을 하셨나요. 현실을 부정하며 덮어두고 눈앞의 쾌락만을 쫓으며 이에 안주하는 하층민들의 모습에 한심하셨나요. 아니면 병기를 통해 뿜어져 나오려는 오물처럼 아무리 뒤집고 나오려고 발버둥 쳐도 가차 없이 짓밟히는 하층민들의 삶이 보여 안타까우셨나요. 연교가 차 안에서 조수석에 발을 올리고 냄새가 난다며 코를 막는 모습은 어떠셨어요. 발은 연교가 올렸지만 냄새는 역시 기택한테서 나는구나 싶으셨나요. 아니면 발은 쥐가 올려놓고 왜 기택한테 냄새가 난다고 저러지 하면서 화가 나셨나요. 소파 애정신에서는요 자기들도 결국 저급하면서 고상한 척하는 거였구먼 하고 빚 꼬셨나요. 아니면 그저 그들의 상황극 놀이로 보셨나요. 박 사장이 칼을 맞는 장면에서는 아니 박 사장을 왜 죽여라고 생각하셨나요. 아니면 귀택의 행동에 통쾌함을 느끼셨나요. 저는 이 영화를 보면서 마치 감독이 우리에게 이렇게 질문을 하는 듯했습니다. 다양한 장면에서 관객들로 하여금 오만 가지 생각을 하게 만들어놨죠. 정답은 없습니다. 똑같은 장면을 보고도 입장에 따라 각각 다른 생각을 하게 될 테니까요.
인간은 모두 똑같은 존재
제가 생각하는 이 영화의 결말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결국 다 똑같다입니다. 가든파티를 준비할 때 연교가 충숙에게 굳이 학익진을 강조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하익진은 이순신 장군이 한산도 앞바다에서 왜군을 선별할 때 펼쳤던 학의 날개 모양을 딴 진영 전술인데요. 적구함이 먹잇감이라고 생각하면 여러분은 무엇이 생각나시나요. 물론 단순히 우리나라를 넘보던 일본 자체를 기생충에 비유하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지만 가든파티에서 칼부림이 나기 시작하고 참석자들이 소리 지르며 도망치는 모습이 제 눈에는 기택 가족이 벌레처럼 도망치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게 보였거든요. 즉 신의 영역인 삶과 죽음 앞에선 결국 우리 모두가 한낮 생명체에 불과하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하층민들이 지하에서 아무리 모스보호를 보내봤자 상층민들에겐 그저 깜빡이는 불빛일 뿐인 것처럼 우리가 이곳에서 우리끼리 아무리 살려고 발버둥 쳐봤자 저 위에서 보기엔 그냥 한낮 먼지 같은 존재일 겁니다. 이 중에 누가 기생충인지 누가 숙주인지는 그저 상대적일 뿐이며 결국은 태어나서 죽고 죽음 앞에서 무기력한 이 대자연을 더 나아가 대우주를 숙주 삼아 살아가는 하나의 생명체일 뿐이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이 영화의 등장인물들 중 결국 행복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는 게 마지막까지 우리 모두를 씁쓸하게 만들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영화 기생충 아니 기생충 리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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