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름진 손으로 한가득 써 내려가는 문장 수북한 담배꽁초에서 피어오르는 연기 사이로 앳된 소녀의 빛바랜 사진을 마주하며 자신의 삶과 그 세월의 무력한 흐름을 오롯이 반출하던 그녀의 회한설인 목소리가 우리를 그때의 그 소녀의 시절 속으로 안내합니다. 1992년 프랑스 영화 [연인]. 프랑스 문학 최고 권위의 콩쿠르상을 수상한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자전적 소설을 원작으로 당시 비평과 상업적 측면 모두에서 성과를 이어온 감독 장자크아노가 과감한 연기를 선보인 신예 '제인마츠'와 홍콩의 스타 '양가위'를 주연으로 캐스팅하여 전 세계적인 흥행 성공을 거뒀던 이 작품은 90년대 그때 한국의 극장가와 비디오 숍에서도 파격적인 정사신에 대한 세간의 자자한 소문으로 그 시절에 혈기 왕성했던 우리 모두에게 익히 야릇한 호기심을 안겼던 그런 영화였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그저 야한 영화로만 기억되긴 아쉬운 영화입니다.
보트 위의 15세 프랑스 소녀
식민시대 베트남의 메콩강 페리보트 난간에 기대어 선 15세의 프랑스 소녀의 앳된 얼굴 위에 짙은 립스틱 화장과 채 성숙지 못한 여린 몸을 감싼 원피스. 그 화려했을 때를 뒤로 한 낡은 구두가 어쩐지 조금 어색한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소녀는 자기밖에 모르는 망나니 같은 성미의 큰 오빠와 그런 점을 장난으로만 생각하고 감싸고도는 답답한 엄마로 인해 아버지가 죽고 남겨진 가족이 진절머리가 납니다. 소녀가 가족과 떨어져 사이공의 기숙학교로 떠나는 날이었습니다. 배 난간에서 흐르는 강물을 덧없이 바라보는 소녀와 그런 소녀를 지켜보는 자동차 유리 너머의 한 시선. 차에서 내린 말끔한 차림의 동양인 남자는 조심스럽게 소녀의 옆으로 다가가 섭니다. 남자는 대뜸 어색한 공기 속에 담배를 권합니다. 소녀는 그 뜬금없는 호위를 단번에 거절합니다. 남자는 소녀에겐 특별한 의미였던 모자를 칭찬하며 조금의 관심을 끄는 데 성공합니다. 그렇게 자신의 재력을 한껏 과시한 중국인은 배가 도착하면 소녀를 차로 태워줄 것을 제안합니다. 두 사람은 차 안에서 서먹하게 떨어져 앉습니다. 나이를 속여가며 남자 앞에 성숙한 여인으로 보이려 하는 소녀에게 남자는 멋쩍게 차이 나는 자신의 나이와 한량의 신분을 밝힙니다. 열띤 표정의 남자가 숨죽이며 손가락을 건넵니다. 그렇게 살며시 마즈다 저릿하게 피어나는 흥분감은 손 전체를 포개어 꼭 끌어 잡아주는 그 절정에 이르러 소녀는 풀어진 눈을 내리 뜨며 달뜬 숨을 내뱉습니다. 그 사이 리무진이 학교에 도착합니다. 소녀는 무심한 안녕의 말을 남기며 돌아서고 남자는 그런 소녀의 뒷모습을 그저 바라볼 뿐입니다. 소녀가 돌아온 기숙사 친구는 기숙사 어느 학생의 매춘 적발 사실을 알려줍니다. 소녀는 낮 시간 그 잠시의 연락이 지워지지 않았는지 낯선 이와의 잠자리에 대한 금기된 낭만을 키워갑니다.
주고받는 이 감정은 무엇일까
그런 소녀 앞에 남자의 리무진이 다시 나타납니다. 남자와 소녀를 가로막는 차문 유리에 달라붙어 창 너머로 농밀한 키스를 남기고 그것을 온몸으로 느끼며 두 사람은 서로의 이 뜨거운 열정을 확인하게 됩니다. 툴롱의 차이나타운으로 남자와 함께 당도해 그의 아내가 아닌 정부들을 위해 마련된 독신자의 집으로 소녀는 들어섭니다. 자기와의 관계를 망설이는 남자에게 사랑이 아닌 정념의 상대를 기꺼이 자처하는 소녀는 자신만의 세계를 지켜온 남자용 모자를 벗어 내리며 그의 앞에 자신의 파르르 한 결심을 내보입니다. 남자를 따라나선 저 자신이 욕망하는 대상에 그의 부유함 역시 따로 떨어져 있지 않음을 소녀는 숨기지 않습니다. 약혼녀에 대해 얘기하는 남자와 담담한 소녀. 프랑스로 떠나갈 여객선 상의 밝고 찬란한 파티를 짙은 어둠 속의 차 뒷좌석에서 지켜보는 두 사람. 자신들에게 결국 곧 다가올 이별을 직시하며 남자는 그 주어질 처지를 거스를 결심이 서고 아버지를 뵙길 청하여 그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남자는 소녀를 곁에 두고 지킬 수 있길 소원하지만 아버지는 단호히 그의 바람을 허락지 않습니다. 남자는 가문에 종속된 자신의 삶에 맞서지 못해 그저 무력이 순응할 수밖에 없습니다. 소녀는 그런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로 그들에게 닥친 경랑의 실체를 짐짓 외면합니다. 비우지 못할 아픈 사랑의 형용을 대신해 의학적인 언설에 실어 자신의 연정을 파괴하려는 남자. 소녀는 그런 그의 구멍 난 마음을 육욕으로 대신해 손수 어루만지려 하지만 간절히 원하는 소녀와 이루어지지 못한다는 절망에 남자는 자기 안에 등불을 스스로 꺼뜨리곤 그 선명했던 갈망을 지워버리고 맙니다. 얼마 후 남자의 혼인식을 일주일 앞둔 때 소녀는 잠길을 달려 그를 다시 찾아옵니다. 남자는 괴로운 바로 지금의 시간을 무위로 돌리려 여론을 망각할 아편 연기를 힘겹게 들이마십니다.
이어지지 못하는 사랑과 그 연인의 인연
그리고 혼인식날이 되었습니다. 처연히 신부를 맞이해 그 옆에 선 남자는 멀리 앉은 소녀와 눈을 맞춰 기색을 나누지만 이내 시선을 돌려 가약을 맺은 신부와 걸어 나갑니다. 소녀의 가족이 프랑스로 떠날 채비를 하던 와중 남자와 소녀의 관계에 대한 엄마의 물음에 소녀는 별이여운 마음에 차게 기대어 답합니다. 가족 모두를 태운 여객선이 프랑스로 떠나가는 날 메콩강의 페리보트에서 그를 처음 만난 날 그랬듯 여린 몸을 난간에 기대어 선 소녀. 여객선이 미끄러져 나아가던 그때 부두 창고 건물에 가려 지긋이 숨어 있다가 머뭇대든 모습을 드러내는 검은색 리무진. 소녀는 그 차에 눈을 붙들어 못내 거두지 못합니다. 그렇게 우두커니 선 자동차는 점차 멀어져 프랑스로 향하는 배는 속절없이 길을 나아가고 거기 남겨진 흑빛의 탁한 물결만이 그 사이를 무상하게 가로질러 흐릅니다. 그날 여객선도 잠이 든 채 항해를 이어가던 밤 소녀는 쇼팽의 왈츠곡에 꿈을 꾸듯 이끌려 그 피아노 연주의 선율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지금에서야 자기 안에 깊이 묻어가려 덮었던 그것을 바다 위 달빛 아래에서 홀로 외로이 꺼내어 확인해 마음에 쓰며 걷잡지 못하게 번지는 그 사랑에 소녀는 자신을 내맡겨 흐느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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