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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헤어질 결심] 불륜인가 사랑인가

by 오로라진 2022. 12.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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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헤어질 결심(2022)

마침내 잡힐 듯 말 듯 가물거리는 이 깊은 영화가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저는 '박찬욱' 감독의 영화들 중에서도 가장 재미있게 본 영화 중에 하나였습니다. 서사의 핵심은 사랑의 다양한 얼굴을 담고 있지만 형식은 수사물의 방식을 따르고 있습니다. 수사물의 묘미는 수많은 증거들을 찾아서 해석하면서 이야기를 완성해 나가는 것입니다. '깐느 박'이라는 명성에 맞게 감독은 다양한 미장센과 영화적 장치들로 우리들을 현혹하고 있습니다. n차 관람을 부르는 영화입니다.

놓칠 구석이 하나도 없는 영화

첫 대사부터 놓칠 구석이 하나도 없습니다. 감독은 이 영화에 영감을 준 작품으로 '정은희' 가수의 '안개' 그리고 스웨덴의 추리 소설 '마르틴 베크 시리즈'를 꼽았습니다. 이 책의 결말이 마음에 들어서 판권까지 사려고 했는데 각본을 쓰다 보니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가게 됐다고 합니다. 아무튼 영화의 첫 대사는 추리소설 덕후들의 심장을 두근거리게 만듭니다. 추리소설에서 사건은 세계의 균열을 뜻합니다. 이 장르의 전제는 우리 사회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굴러가는 곳인데 살인 사건은 대단히 비합리적이고 비이성적이기 때문에 사회의 불안을 초래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건이 뜸하다는 말은 본디 '해준'의 세상은 불안이 적고 안정적이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해준'의 세상을 상징하는 것이 바로 아내 '정안'입니다. 원전에서 근무하는 이과 출신의 여성 '정안'은 언제나 정확한 수치와 함께 이성적인 대화를 나눕니다. 이과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게 '정안'뿐은 아닙니다. '해준'의 대화법 역시 상당히 이과적인 부분들이 있습니다. 숫자에 밝은 '해준'은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사회라 나름 잘 지내고 있었습니다. 가장으로서 가정을 수호하고 합리적이고 지능적인 수사로 실적을 쌓으면서 최연소 경감 타이틀까지 거머쥐었습니다.

합리적인 남자와 비합리적인 여성의 만남

영화는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누어 볼 수가 있는데 전반부는 이성적인 남자 '해준'이 비합리적인 '서래'의 세계로 들어가는 이야기입니다. 많은 분들이 기억하시는 대사가 있을 겁니다. 첫 번째 신문에서 '서래'는 공자를 빌려서 이렇게 덧붙입니다. "나는 인자한 사람은 아닙니다. 하지만 바다를 좋아해요". 여기서 '해준'은 자기도 바다를 좋아한다며 어린아이 같이 눈을 빛냅니다. 눈썰미가 좋으신 분들이라면 캐치하신 부분이 있을 텐데요. 바로 영화에서 '해준'의 세계는 바다를 의미하고 '서래'의 세계는 산으로 묘사된다는 점입니다. 산에서 일어난 '기도수'씨의 변사 사건으로 인해서 '해준'의 안정에는 균열이 가기 시작했습니다. 산을 오르면 오를수록 그는 '서래'의 세계로 빠져들게 됩니다. 그의 상식에서 보자면 이해가 조금은 어려운 비합리적인 세계이기도 합니다. 산과 바다 두 사람의 세계는 완전히 반대된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이것만 갖고 두 사람을 표현했다면 '깐느박'이 아닙니다. 영화의 독특하면서도 예술적인 장치는 산과 바다에 조금 더 치밀한 구석에 있습니다. 두 사람이 세계를 인식하는 방법의 방향성이 다른 것입니다. '정훈희' 가수의 안개에서 감독의 가슴을 후벼 팠다고 하는 가사는 눈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연출을 하면서도 본다는 것에 초점을 맞췄다고 합니다. '해준'은 바다를 좋아해서 부산에서 형사를 하고 있습니다. 바다 하면 떠오르는 게 있습니다. 바로 수평선입니다. 바다를 볼 때 마음이 안정되는 것은 우리의 시선이 그냥 똑바로 보기만 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수평은 평등을 연상시키기도 합니다. 실제로 '해준'은 사람을 대하는 데 있어서 예의를 중시하는 사람입니다. 강력계 형사이지만 언제나 깔끔하게 정장을 차려입고 대화법은 다정하면서도 중요한 매너가 배어 있습니다. 상대방이 누구든 간에 사정을 최대한 배려해 주려고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상대를 존중하는 그가 내려다보는 대상이 있는데 그건 바로 시체입니다. 그런데 이 사건들은 '서래'와의 연결고리가 됩니다.

수직과 수평의 관계

이렇게 '해준'의 세상이 수평으로 구성된 것과 달리 '서래'의 세상은 수직으로 움직입니다. '서래'는 주로 산을 터전으로 삼고 있는데 우리가 흔히 산을 볼 때는 꼭대기를 올려다보게 되죠. 즉 시선이 위아래로 움직이는 것이 산입니다. 감독은 다양한 장치로 '서래'라는 인물을 수직으로 표현하는데 먼저 중국인인 그녀가 부산에 온 이유로 독립운동가의 후손이라는 설정이 부여되었습니다. 사실 그냥 불법 체류자라고 해도 무리는 없었을 텐데 굳이 이런 설정을 한 것은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사유입니다. 살인자고 또 외국인인 '서래'에게 감정적으로 동정할 여지를 만드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는 '서래'에게 또 다른 수직성을 부여하는 것인데요. 중국에서 왔다고 하면 일단 공간적으로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수직의 선이 그려집니다. 여기에 덧붙이는 것이 누군가의 후손이라는 점이에요. '해준'은 자식이 있지만 스치듯 언급되고 전혀 존재감이 없습니다. 처음에 자식이 언급된 것은 '해준'이 안정적인 가정을 꾸리고 있었다는 걸 어필하는 것에 불과하죠. 하지만 '서래'는 누군가의 딸이고 손녀라는 것이 강조됩니다. 누군가의 후손이라면서 3대를 제시하면 한 집안의 족보 같은 게 그려지는 걸 노린 셈입니다 수직성은 계속해서 등장합니다. 그녀가 보는 드라마들은 모두 남자 주인공을 올려다보고 '서래'는 말합니다. "위계질서가 분명한 이 세상에서 내가 당신 같은 사람을 만나려면 살인 사건 정도는 일어나야 해요". 그래서 그녀가 마지막으로 헤어질 결심을 실행하는 순간 '서래'는 수평선으로 향하지 않고 굳이 땅굴을 팝니다. 수평인 그의 세계에서 수직인 자신만의 공간을 만들어내며 '해준'은 시야로는 찾을 수가 없는 '미결 사건'이 되어 남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인공들의 세계는 수평과 수직으로 구분되지만 사실 관련이 없어 보이는 사건도 수직성을 보이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세계관을 이런 식으로 넓혀볼 수가 있습니다. 예컨대 요동치는 감정의 파동을 나타내는 것이 수직성, 칼에 찔리거나 사람이 죽어도 침착해야 하는 이성이 수평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성은 어떻게 보면 비인간적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사람이 죽고 죽이는 사건은 아주 슬픈 일이고 여러 가지 감정이 뒤섞여 있는데 이걸 한 단어로 정의하는 것이 "수사"입니다. 어쩌면 '해준'은 이 모순을 이미 느끼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렇게 세상과 인물의 부조화는 인물들의 비극으로 이어집니다. 1부의 끝에서는 '해준'의 자부심이 죽었고, 2부의 끝에서는 '서래'가 세상을 등집니다. 아마 '해준'의 남은 자부심도 그녀와 함께 가지 않았을까요. 이성적인 형사는 영화에서 네 번 안약을 넣는데 이 사건들은 모두 그를 감정의 소용돌이로 몰아갑니다. 냉정해야 할 사건들 앞에서 고개를 젖히는 행위는 '해준'이 평정심을 잃을 거라고 암시하는 동시에 경찰 위에 하늘이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주는데요. 안약을 넣고 똑바로 보려고 해도 인간은 모든 것을 캐치할 수 없습니다. 완전히 이성적일 수는 없기 때문이죠. 감독은 '해준'의 모호함을 은근히 강조합니다. '해준'은 분명히 예의 바르고 친절한 형사지만 아내의 남자 앞에서 주먹을 빠득거리기도 하고 사랑하는 여자를 폭행했던 전 남편처럼 깔끔을 떨기도 하죠. 수의 밝은 이과생 같지만 그를 시인으로 기억하시는 분들이 더 많을 겁니다. 이처럼 영화는 냉정과 열정 사이에서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습니다. 감독은 이성과 감정, 형사와 용의자, 피해자와 피의자 등 다양한 대조를 보여주고 있지만 사실 이들은 명확하게 대조되지 못합니다. 사건이란 동기는 되게 감정적이지만 구성은 상당히 지능적이기 때문입니다.

색상의 모호함이 주는 표현들

감독은 이 모호함을 청색인지 녹색인지 산인지 바다인지 모를 청록색으로 표현했다고 하는데요. 청록색은 영화 곳곳을 물들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강조되는 색깔은 청록색뿐이 아닙니다. '서래'가 '해준'에게 처음 관심을 보이고 미행하던 날 길가에 차를 세우고 비상등을 켜두는데 깜빡이는 노란 불 사이로 '해준'을 지켜봅니다. '홍산호'가 죽을 만큼 좋아한 여자의 머리색도 노란색이고 이를 알아채는 설에도 노란 블라우스를 입고 있습니다. 마지막에도 '서래'는 파란 바다가 아닌 노란 모래 속으로 들어갑니다. 색깔이 하나 더 있습니다. 빨간색은 사랑의 상처를 상징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 이유는 '서래'가 저지르는 3건의 살인 사건이 모두 빨간색으로 상징되기 때문입니다. 엄마의 유골함은 빨간색이었고 '기도수' 씨의 사건도 빨간색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싸다구의 신인 '사철성'을 흉기로 만드는 날도 빨간 장미 한 다발을 들고 병원으로 갔습니다. 사진들을 불태우러 갔을 때 설에는 분홍 니트와 빨간 치마를 입고 있었고, '사철성'이 등장했을 때도 설에는 빨간 원피스를 입고 있었는데 이때 '사철성'은 엄마에 대한 사랑으로 폭력을 휘둘렀습니다. 결국 사랑은 또 사람은 아주 다양한 얼굴을 가지고 있습니다. 냉정이나 열정 어느 하나로 정의하기가 어렵습니다. '정훈희' 가수의 노래에서 '안개'는 나의 눈물을 감춰주기도 하지만 님의 모습을 보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이기도 합니다. 진심을 터놓기 어려운 인물들이 의심할 여지가 없이 진심을 내보이는 순간들은 뚜렷한 빛이 함께 했습니다. 사랑한다고 분명히 말하진 않더라도 전할 수 있는 진심은 있습니다. 모순적이게도 우리는 헷갈려 하지만 또 어떻게든 느끼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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