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버닝은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헛간을 태우다'를 원작으로 한 영화입니다. 비록 그 소설과는 굉장히 다른 영화입니다.
종수와 해미의 만남
유통회사 아르바이트생 종수는 수화물을 나르러 거래처에 갔다가 그 앞에서 개업 이벤트 차 춤을 추고 있던 어릴 적 같은 파주의 같은 동네에 살았던 해미를 만나게 되고 급속도로 친해진 둘 사이에는 무언의 교류가 오갑니다. 해미는 인생의 의미를 찾고 있었습니다. 해미는 종수에게 자신이 아프리카 여행을 갈 동안 키우는 고양이를 돌봐달라는 부탁을 하게 됩니다. 여행에서 돌아온 해미는 아프리카에서 만난 벤이라는 남자를 종수에게 소개합니다. 자신과 달리 재력과 여유를 겸비한 벤을 보는 종수의 눈에는 의심이 가득합니다. 어느 날 벤은 해미와 함께 종수의 집으로 찾아가게 되고 자신의 비밀스러운 취미에 대해 고백합니다. 종수는 벤의 비밀을 듣고 난 뒤 그를 향한 의심은 더 커져만 갑니다.
진실과 거짓말
영화 버닝을 보면서 이해 가지 않았던 부분에 대해 함께 알아보겠습니다. 버닝을 보신 분들은 한 가지 생각이 드셨을 겁니다. 그래서 해미는 벤이 죽였을까? 제 생각엔 그렇지 않았을 것 같다입니다. 영화를 보면 극 중 인물들을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평소에 진실을 이야기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요. 평소 진실만을 이야기하던 사람들로는 마을 이장님, 해미의 어머니와 언니, 미스터리한 남자 벤을 꼽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평소 진실을 이야기하지 않는 사람으로는 종수의 어머니와 종수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이 인물들이 영화에서 언급했던 우물의 존재 여부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보겠습니다. 평소 진실만을 이야기했던 사람들은 해미가 빠졌던 우물이 없었다고 이야기합니다. 종수는 해미를 찾기 위해 해미의 어머니와 언니가 운영하는 분식집에 갑니다. 자신을 바로 알아보는 그들에게 종수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해미는 누군가 나타나 주길 기다리면서 우물의 동그란 하늘만 바라봤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이야기합니다. 걔 이야기 잘 지어내 우리 집 옆에 의무도 없었어라고요. 또 한 명의 진실만을 이야기했던 사람 이장님을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종수가 아버지의 탄원서에 서명을 받으러 갔을 때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별거 아닌 형용사 어구 '착하고 인정만'이라는 단어에 이건 사실이 아니잖아라고 말했던 이장님이었어요. 그리고 그는 우물이 없었다고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아들을 보고 싶었다는 핑계로 돈 500만 원을 뜯으러 온 어머니는 해미의 집에 우물이 있었다고 주장합니다. 얼마나 깊었는지 기억은 나지 않아도 해미의 집에 우물이 존재했다는 것은 확실하다며 자신감에 찬 말투로 대답합니다. 또한 항상 자신의 마음을 숨기고 감추려고 했던 종수는 원하는 답 '우물은 존재했다'라는 그 답을 듣고 싶어 하는 생각을 가진 채 해미를 알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우물의 존재 여부에 대해 묻고 다녔습니다. 이처럼 평소 진실만을 이야기했던 사람은 우물은 존재하지 않으며 종수는 해미를 구해준 적이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는 사람들은 우물이 존재했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공존을 바라는 기성세대화 젊은 청춘들
그렇다면 벤은 왜 비닐하우스를 주기적으로 태운다는 발언을 하고 여자들이 자신의 특별한 경험에 대한 설명을 할 때 어째서 하품을 하고 집 은밀한 곳에 여성용 팔지들을 모아두었던 것일까요. 감독의 인터뷰를 통해 보면 알 수 있듯이 영화 버닝을 통해 감독은 기성세대와 공존하는 젊은 청춘들이 느끼고 있는 현실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합니다. 벤은 우리 모두가 꿈꾸는 워너비적인 삶을 살고 있습니다. 좋은 집, 좋은 차, 좋은 가족까지.. 하지만 그런 그가 끌리는 여자들은 자신과는 전혀 다른 세계의 여자들입니다. 가게 길거리에서 춤추는 해미도 그러했고 해미가 사라진 뒤 만나는 면세점 직원인 두 번째 여자도 그러했죠. 벤은 이런 여자들을 만나고 있지만 자신의 세계는 끝까지 유지합니다. 두 여자들의 공통점은 다른 사람들의 시선과 상관없이 자신이 좋아하는 것, 춤, 면세점에서 중국인들의 샘플 요청에 관한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 대해서는 거리낌 없이 이야기합니다. 이처럼 벤을 상징하는 기성세대는 자신이 한때 꿈꿨던 좋아하는 것 과거의 꿈 그리고 젊은 이러한 것들을 가지고 있으며 인생의 의미를 찾아내려고 노력하는 열정이 가득한 젊은 여자들을 보면서 흥미를 느낍니다. 하지만 그러한 젊은 청춘들의 열정적인 몸부림이 때로는 그를 지루하게 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저는 종수가 오해했던 화장실의 액세서리들은 벤이 다른 세계 자신의 꿈을 좇는 젊은이들이 사는 세계의 여자들을 만나고 난 뒤 모았던 단순한 전리품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처럼 벤이 무관심한 사이코패스처럼 보이는 것은 영화적 장치라고 생각합니다. 끝없이 종수처럼 그를 의심하라고 관객들에게 보내는 감독의 메시지인 셈이죠. 종수의 집에 들러 해미가 잠든 사이 종수에게만 털어놓았던 '두 달에 한 번 비닐하우스를 태운다'라는 비밀은 결국 그가 극처 방 요리를 하며 언급했었던 '요리를 좋아하는 이유는 내가 재물을 준비하고 내가 먹어 치우기 때문이다'와 같은 메타포 비유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벤이 죽기 전 마지막으로 태웠던 비닐하우스. 기성세대의 결핍을 채워주는 젊음은 결국 종수 자신이었던 셈입니다. 해미보다 어쩌면 자신의 인생의 의미를 더 찾고 싶어 했던 사람은 종수였으니까요. 어머니도, 아버지도, 친구들도 없던 종수에게 혜미는 마지막 희망이었고 그녀를 사랑하게 됨으로써 그는 방황하는 청춘들의 끝판왕이 되었었죠. 하지만 정작 종수 자신은 그 불타버린 비닐하우스가 너무 가까이 있어서 그것이 메타포이며 그 비닐하우스는 자신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벤 같은 사람도 있는 반면 종수의 아버지 같은 사람도 존재합니다. 중동에 파견되어서 근무에 큰돈을 벌어 왔고 파주집에 걸려 있는 사진으로 미루어 보아 월남전 참전도 한 것으로 보입니다. 변호사의 말마따나 남들 말을 들었으면 강남에 집도 샀을 텐데 자기 자존심을 자신이 못 이겨 현재는 교도소에 수감된 채 있습니다. 이처럼 기성세대의 '버닝'이라고 해서 모두 벤처럼 성공한 '버닝'은 아닙니다. 종수와 젊은 청춘들이 할 수 있는 '버닝'은 벤과 기성세대들의 '버닝'과는 조금 다릅니다. 해미를 찾기 위해 스스로 발로 뛰어다니고 땀을 비 오듯 흘린 종수는 해미의 죽음이나 비닐하우스의 방화가 실제 하는지 직접 찾아야 했습니다. 종수는 자신에게 마지막 희망 해미를 잃자 처음으로 그저 무작정 기다리고, 타버린 비닐하우스를 무작정 찾는 것이 아닌 자신이 결정한 액션 행동을 처음으로 취합니다. 이런 면에서 영화 '버닝'을 보자면 일종의 성장 영화인 셈이기도 합니다. 한 가지 문학 작품이 영화 속에서 더 등장합니다. 돈과 넓은 집, 유복한 가정까지. 벤은 위대한 개츠비의 개츠비가 소유하지 못했던 행복한 가정까지 소유하고 있습니다. 그런 벤을 향해 종수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돈은 많은데 뭐 하는지 모르는 사람을 개츠비라고 해" 한국에는 개츠비가 너무 많아. 저 사람이 널 왜 만나는 것 같아". 해미는 극 초반 남산 타워에 대해 이렇게 설명합니다. 북향집이라 하루에 딱 한 번 운이 좋으면 집 안에 빛이 들어온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그 빛은 단 한 번 종수와 혜미가 실질적인 성관계를 가졌을 때 처음 나옵니다. 그 후 아프리카로 떠난 해미를 생각하며 남산 한번 보고 해미 사진 한번 보고 이런 식으로 번갈아가며 자위를 행합니다. 그렇다면 해미는 죽었는가? 이 궁금증 또한 관객들에게 다가오는 의문점일 것입니다. 아프리카에서 돌아오고 해미, 벤, 종수는 함께 저녁 식사를 합니다. 그때 해미는 울면서 이렇게 이야기하죠. "세상에 끝에 갔을 때 나도 저 노을처럼 사라지고 싶었어. 죽는 건 무섭고 그냥 아예 없었던 것처럼 사라지고 싶었어" 그래서 저는 개인적으로 벤의 말처럼 세상에서 유일하게 믿고 있던 종수마저 자신에게 창녀라는 발언을 하자 세상의 끝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던 해미가 스스로 잠적했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생각합니다.
종수의 자격지심
종수는 극 중 문예창작과를 나온 소설가 지망생입니다. 하지만 자신이 어떤 소설을 써야 할지 어떤 소설을 쓰고 있는지조차 본인 스스로 알지 못합니다. 아버지 재판 때문에 변호사를 만났을 때 변호사는 종수에게 물어봅니다. 가상의 세계를 창조하는 소설을 쓰고 싶어 하는 종수지만 그가 현실에서 쓰고 있는 유일한 글은 아버지의 탄원서입니다. 이처럼 종수는 젊음이라는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을 소유하고 있지만 정작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청춘일 뿐입니다. 영화 '버닝'에서 나오는 종수의 자격지심은 해미가 종수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던 장면과 겹쳤습니다. 첫 번째로 그들의 첫 만남이 바로 그 장면입니다. 해미가 주작으로 준 핑크색 시계였죠. "여자 친구 구해야겠네"라는 말과 함께 그 시계를 건네준 종수였고 해미는 실제로 아프리카에 다녀오고 나서도 한동안은 핑크색 시계를 푸르지 않았었습니다. 아프리카에서 돌아온 해미와 뱀과 함께 저녁 식사를 함께한 정수는 자신의 녹슨 트럭과 비교되는 포르셰에 주춤합니다. 내가 데려다줄까라는 벤의 말에 종수는 "그래 내가 길이 멀잖아"라고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해미는 그런 종수를 빨리 쳐다만 봅니다. 이 이후부터 해미는 시계를 푸르고 등장합니다. 일방적인 관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겠죠. 하지만 해미는 계속해서 종수에게 자신의 마음을 고백합니다. 처음으로 세 사람이 벤의 집에 갔을 때 메타포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자 배은 메타포가 뭔지 종수 씨한테 물어봐라고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종수는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해미를 뒤로한 채 화장실에 가버립니다. 그 뒤 해미에게 또 이렇게 이야기하기도 했죠. "저 사람이 널 왜 만나는 것 같아" 라구요. 그 뒤 파주집에 오고 싶다는 해미를 향해 종수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여긴 왜"라고요. 대마초에 취해 옷을 벗고 춤을 추는 해미를 향해 종수는 이렇게 이야기하기도 했습니다. "또 왜 그렇게 남자들 앞에서 아무렇게나 옷을 벗어. 창녀라 그러는 거야?"라고 말입니다. 종수는 혜미가 사라진 뒤 카페에서 벤을 만나기도 했었죠. 그때 벤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해미는 종수씨만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 했어요. 그래서 나도 모르게 그게 질투가 났었던 것 같아요"라고 말입니다. 이렇게 종수는 잘못된 곳에 자신의 힘을 쏟아붓고 있었습니다. 자신을 사랑하는 해미를 믿지 못해 결국 상처를 주었던 거죠. 해미에게 다가오는 밴을 향해 날카로운 가시를 보이면서요. 종수와 해미는 아직 어리기에 부족한 점 투성이었고 상처도 쉽게 받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결국 종수는 더 나아가기 위해 벤을 살해함으로써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활활 타고 있는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운전을 하며 그 현장을 빠져나갑니다. 기성세대들이 바라보는 젊은 청춘들을 향한 이창동 감독의 이야기 '버닝' 저는 굉장히 흥미롭게 재미있게 본 작품이었습니다. 그래서 추천드리고 싶은 영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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